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인생이란 어떤 사람에게 선을 잇고 어떤 언어에 줄을 그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말들 중에 내가 밑줄을 그은 말들이 나의 언어가 된다 우리 모두는 시간 앞에서 유일한 존재들이다 내가 가진 시간의 양이 목숨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고 있다는 말은 내 목숨의 일부를 내주고 있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내 목숨이 사용된다 그래서 인생에서 시간은 어느 것에 더 목숨을 소비하고 사용했느냐의 결과를 말한다 나는 믿는다는 말의 속뜻을 헤아려보았다 약속을 지켜라,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실망시키지 마라, 내 뜻을 거스르지 마라, 기필코 해내라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토록 숨 막히는 말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
언니는 그냥 집에서 가장 먼 바다를 떠올렸다고 했다. 정말 말 그대로 모래밭에서 오래오래 앉아 있기만 했다고,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가는, 무언가를 덮고 쓸고 아주 젖어들게 하는 파도를 보면서. 그렇게 패턴을 지닌 것들은 우리를 안정되게도 하는데 결국 그런 주기 안에서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피었다가 어김없이 지고 말 것임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용서해주는 것, 서툴렀던 어제의 나와 그 사람에게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우리는 그런 어제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누군가는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건 우리의 체온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내려간, 하지만 완전히 얼지는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여전한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힘들다면 잠시 시선을 비껴서 ..
텅 빈 화분을 바라본다 그 곳에는 언젠가 꽃이 피기를 염원하며 물을 주던 마음이 있었다 이 텅 빈 집에 앉아 있으니, 꿈이며 희망이며 의지며 사랑이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근데, 나는 나를 살리려고 산 적도 나를 목표한 적도 없는데 나를 키우고 있는 건 무얼까 빈 방에 앉아 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했다 나는 저 홀로 재배되고 있다 한 번의 봄은 다시 찾아왔고, 걸었던 그 거리를 다시 걷기도 했지만 어떤 꽃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더라 가슴을 치다가 영영 져버리기도 하더라 네가 무심코 뱉은 말에 우울해지다가, 네 옆에 있는 음악도 우울해질 때가 있다 이 공간도, 시간도, 계절도 우울해진다 저기 이유도 모른 채 살아 있는 물고기도 하염없이 우울해진다 갑자기 내 삶이 다 서글퍼져서 어항에 코 박고 빠져..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웠을까, 미주는 생각한다 키운다는 의미가 뭘까 미주는 책상및에 놓인 허브 화분을 바라본다 잘 크고 있다 미주는 허브에 물과 햇볕 잘 드는 집을 제공한다 그것이 키우는 것일까 허브는 미주로 인해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라는 건, 그냥 스스로 알아서 자라는 게 아닐까 "내가 엄마 선글라스 쓰는 걸 엄마가 좋아해." "어째서?" "글쎄…… 그건 아주 심오한 얘긴데, 기억 위에 기억을 얹는 거지."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음은 슬픔과 한몸인데 그렇다면 삶이 기쁨과 한몸이냐,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인생은 그냥 복불복인거야 이왕지사 그렇다면, 명백한 슬픔을 선택하느니 차라리 어떤 쪽일지 모르는 삶을 선택하는 게 조금은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또 이렇게 말하면 늙은이 철학하네, ..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가끔 내가 마음에 들었지만, 자주 내가 싫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의 결과 참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비슷한 점도 많았고, 그래서 나를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리고 모든 문장들이 꾸밈없고, 다정하고, 예쁘다는 점이 무척이나 좋았다. 간직하고 싶은 글들이 많아, 통째로 밑줄을 치고 기억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호를 기다리다 날아가는 새를 봤을 때나, 길을 지나가다 들리는 누군가의 대화 속에서, 혹은 밀려오는 파도를 보면서, 쌓여있는 낙엽을 보면서… 말하자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그것을 곱씹어 생각하고, 그로부터 깨닫기도 하고. 순간을 깊..
지나고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다. 그때 그에게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 기회를 놓치지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게 전부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지나고서야 깨닫는 것들이란, 지나고서야'만' 깨달을 수 있다. 누군가의 아픔이 그를 규정짓지는 못한다. 마음속에 깊은 아픔이 있다고 해서 그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지 못하는 이유가, 그가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다. 홀로 위로하기 어려운 아픔일수록, 상처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수록 스스로를 더 깊이 돌봐주고 쓰다듬어줘야 한다. 당신은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아픔으로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가끔 쉴 땐 자야했다. 그래야 일어나면 다시 일상을 버틸 수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져 ..
우리는 그런 거야. 오래된 낡은 습관 같은거. 너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네가 더 준비가 되면 그때 결혼하자고 했지만… 그런데 준엽아, 나 너랑 결혼하면 행복할까? 실은 너를 닮은 아기를 꼭 낳고 싶었어. 여행을 좋아해서 햇볕에 늘 그을려 있지만 결이 좋은 너의 피부, 웃으면 잇몸이 다 보이는 너의 얼굴을 꼭 닮은 아이를 말이야. 결국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 되어 버렸지만 이 말을 직접 너에게 했더라면 넌 조금 달라졌을까. 헤어질 마당에 이런 말을 하면 뭘 해. 벌이가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내 상황을 이해해 줄 곳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더 나은 삶은 없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린다. 봄을 기다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다린다. 다음을 기다린다. 저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
나라고 세상이 겁나지 않겠는가 나라고 모든 슬픔에서 자유롭겠는가 당신을 우울에서부터 끌어내고 싶은 것은 내가 강해서가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 안도감이 주는 치유를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당신을 생각하며 편지를 쓸 때는 주소란에 쓰는 글씨마저 예쁘게 적으려고 노력할 만큼 당신이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들까지 정성껏 사랑하곤 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의 명대사에 자주 감탄하곤 하지만 실제로 감격하는 건 그리 멋진 말이 아니잖아요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지칠 때 보듬어주는 손길 우리를 눈물 나게 하는 것들은 그런 마음이 전부인데 네 곁을 떠나오면서 나는 알았지 상대의 마음만을 염두에 두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상처만 늘어가는 거였어 너를 사랑하기에 감당했던 많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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